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이집트 (문단 편집) == [[이집트 신화|종교]]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집트 신화)] 이집트의 종교는 [[성경]]이나 [[쿠란]]처럼 일원화된 경전이나 교리가 있는 종교가 아니었다. 교리나 도덕 준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일부분이자 일상생활에 더 가까웠던 것. 이집트인들은 2가지의 신을 믿었다. 하나는 태초부터 존재했던 자연의 신들. 우리가 익히 아는 [[오시리스]]나 [[호루스]], [[아누비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나머지 부류는 신격화를 통해서 후대에 신으로 등극한 존재였다. 세상을 떠난 [[파라오]], 성스러운 동물들은 이 부류의 신들이었다. 이집트에서는 오직 왕족만이 사후에 신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지만 정말 능력이 특출난 경우에 한해서 일반인도 신이 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이집트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재상이자 건축가 [[임호텝]]이다. 고대 이집트 신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제]]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신관들은 대중들에게 설교하거나 전도하지도 않았다. [[성경]]처럼 단일한 교리나 경전도 딱히 없었고[* 다만 종교적 문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에 따라서 그 믿음도 달랐다. 신전과 신관은 누구보다 세속적이었다. 신전은 엄청난 양의 재산과 토지, 노예를 소유했고[* [[람세스 3세]] 시대 [[카르나크 신전]]은 무려 433개의 과수원, 421,000마리의 가축, 65개의 마을, 83개의 선박, 46개의 작업장을 소유했다. 수백 에이커가 넘어가는 농토를 보유했으며 81,000여 명이 넘어가는 인력을 직접 부렸다.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은 수백 에이커의 농토, 64개의 과수원, 45,544마리의 가축, 103개의 마을, 3척의 함선, 5개의 작업장에 12,700여 명의 인력을 소유했다.] 나중에는 파라오의 권력까지 노렸다. 제사장과 신관들은 결혼도 가능했고 자녀도 낳을 수 있었다. 보통 사제들은 4개의 성직을 한꺼번에 맡았는데, 그래서 12달에 3달만 실제로 성직 업무에 봉사했다. 나머지 8~9개월은 사업을 벌이거나 경제활동에 참여했다. 성직에 봉사하지 않을 때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성직 업무를 보는 3개월 동안은 몸을 정결히 해야만 했다. 이 기간에는 [[성관계]]를 금했고, 오직 [[리넨]]과 파피루스로 만든 옷만을 입었다. [[가죽]] 옷은 불결하다 해서 입을 수 없었다. 몸 전체에 난 체모를 싹 밀었고 특정 음식도 못 먹었다. 제례를 지내기 직전에는 신전 앞에 있는 저수지에서 몸을 씻으며 향유로 입을 헹궜다. 제사를 지내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았다. >1. 아침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를 때 '위대한 신이여, 평화로이 깨어나소서'로 시작되는 새벽 찬송을 읊는다. > >2. 대사제가 불이 꺼진 성소 안으로 들어가 성소의 봉인을 풀고 문을 개방한다. 신을 대면하는 것은 오직 파라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일개 신관들이 신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미리 '신을 만나러 저를 보낸 분은 왕이십니다'라는 내용의 주문을 외웠다. > >3. 작은 [[마아트]] 여신의 신상을 신 앞에 바친다. 신상 앞에서 기도문을 4번 반복해서 읊조린다. 이 기도문을 읊으면 신의 영혼이 신상으로 들어가 지상에 현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 >4. 기도문을 읊고나면 향유로 신상을 문지른 다음, 걸쳐져 있던 옷을 벗기고 그 앞에서 향유를 태운다. 절차를 마치면 새 흰색 리넨 옷을 입히고 향과 화장품을 바른다.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하기도 했다. > >5. 옷을 입히면 이제 신에게 먹을 것을 바칠 차례였다. 빵, 고기, 꿀, 케이크, 과일과 야채 바구니, 그리고 [[포도주]]와 [[맥주]] 등 다양한 음식들을 바쳤다. 신에게 바칠 음식은 모두 신전에 소속된 신성한 밭이나 과수원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신에게 바칠 짐승을 도축할 때도 절대로 피가 땅에 떨어지게 하면 안되었다. 신상이 보이는 앞에서 짐승을 도축해서도 안되었다. > >6. 신이 음식을 다 먹었다고 생각되면 음식을 물렸다.[* 이 음식은 하위 신들에게 차례로 돌아간 다음, 나중에는 신관들이나 신전 인부들이 먹었다.] 그런 다음, 성소 전체에 성수를 가볍게 뿌리고 [[소다]]와 수지 다섯 알갱이씩을 흩뿌렸다. 더 많은 향을 태우고 불을 지핀 다음, 다시 문을 닫고 봉인했다. 성소를 봉인하기 직전에는 성소 내부에 인간의 자취를 모두 지우기 위해 빗자루질 한 다음 뒤로 걸어나왔다. > >7. 똑같은 의식을 아침, 점심, 저녁 총 3번 반복한다. 아침 제례가 가장 성대했고 점심과 저녁 제례는 상대적으로 더 간소했다. 아침 제례에는 성소의 문을 개방했지만 점심, 저녁 제례 때에는 성소의 문을 절대로 열지 않았다. 보통 일반적인 종파라면 신관들을 2개의 계급으로 나눴다. 상위 신관들은 '신의 종'이라는 의미의 'hm-ntr'이라 불렀다. 이들은 신상과 가까운 곳에서 일할 수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선지자'라고 높여부르기도 했다. [[신탁]]과 신의 뜻을 해석하는 자들이 바로 이 상위 신관들이었기 때문. 상위 신관들 사이에서 최고 대신관이 나왔다. 대신관은 신분이 고귀한 자들 중에 나이와 경험이 많은 자들 중에 뽑았는데, 'hm-ntr-tpy' 또는 '첫 번째 선지자'라고 불렀다. 위대한 신들을 모시는 대신관들은 따로 특별한 호칭을 붙여 쓰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창조신 [[프타]]의 대신관은 '기술을 잘 지휘하는 자', [[라(이집트 신화)|라]]의 대신관은 '보는 것에 탁월한 자', [[토트]]의 대신관은 '둘 사이의 중재자', [[크눔]]의 대신관은 '만물을 빚어내는 자' 등의 타이틀을 썼다.[* [[고왕국]] 시절 [[하토르]]와 [[네이트]]처럼 여신들의 경우에는 여신관이 최고 대사제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자가 신관직을 맡는 일은 점차 사라졌고, 여자는 기껏해야 댄서, 음악가, 무희에만 머물렀다. 물론 파라오의 총애를 받는 여자 왕족들이 가끔씩 성직에 임명될 수는 있었다.] 상위 신관들 아래에는 하위 신관들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어로는 '순수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상위 신관들이 하지 않는 잡다한 일들, 예를 들어 제사에 필요한 물을 떠오거나 퍼레이드에서 신상을 짊어지고 나르는 일 따위를 맡아했다. 웬만하면 기술도 다룰 줄 알아야 해서 장인처럼 예술품이나 공예품을 직접 만드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 하위 신관들이 오랫동안 봉사하면서 경력을 쌓으면 'it-ntr', '신의 사제'라고 불리는 중위 신관으로 승급할 수도 있었다. 중위 신관들은 아직 상위 신관으로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하위 신관들을 관리감독했으며, 몇몇은 잘하면 신상을 직접 돌보는 업무를 맡기까지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hutterstock_9824972a.jpg|height=3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gic-of-Heka.jpg|height=300]]}}} || |||| '''고대 이집트식 제례의 모습.''' |||| 신의 모습을 새긴 신상(神象)은 신전 밖에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유일한 예외가 축제 기간이었다. 축제 기간에는 나무로 만든 방주에 신상을 올려놓고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퍼레이드는 평민들이 신상을 직접 영접 가능한 유일한 기회였다. 이집트인들은 신상을 직접 바라보면 병들이 씻은 듯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 기간 동안 신탁을 구하는 것도 가능했다. 바닥에 예/아니오를 새긴 돌 조각을 깔아놓고, 신상을 얹은 방주가 그 위를 지나갈 때 신에게 질문을 하는 방법이었다. 신관들의 어깨에 실린 방주가 앞으로 가면 '예', 뒤로 가면 '아니오'라는 뜻이었다. 항상 신전에 있는 신상에게만 질문을 하는 건 아니라서 가정마다 하나씩 마련해놓은 미니 신상에도 기도를 하거나 질문을 할 때도 많았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이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종교 축제는 단조로운 일상을 깨주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축제는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이다. [[아문]] 신과 [[파라오]]를 찬양하는 목적으로 열리던 축제로, [[룩소르|테베]]를 중심으로 매년 음력 2월에 열렸다. 다른 축제들만큼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신왕국]] 시절에는 국가적인 최고의 축제였고 특히 제20왕조 시절에는 무려 27일이라는 기간에 걸쳐 열리기까지 했다. 오페트 축제는 [[나일 강]]의 범람으로 농부들이 쉬는 휴경 기간에 열렸다. 사제들은 [[카르나크 신전]]에 안치되었던 아문 신상을 꺼내 방주 위에 얹은 다음 어깨에 들쳐메고 [[룩소르 신전]]까지 행진했다. 룩소르 신전에 도착하면 미리 기다리던 [[파라오]]가 아문 신상을 맞았고, 그 안에 들어가 비밀스러운 의식을 치렀다. 이 오페트 축제가 유난히 인기가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나라에서 평민들에게 음식과 술을 아낌없이 뿌렸던 덕이었다. 기원전 12세기의 한 기록에는 이 축제에 빵 11,341 덩어리와 맥주 385 항아리를 평민들에게 공짜로 제공했을 정도였다고. 오페트 축제만큼 유명하고 중요한 축제는 '헤브-세드 축제'였다. 파라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축제로, 파라오가 즉위하고 30년이 된 해에 처음 치렀고 그 후부터는 매 3년부터 축제를 개최했다. 매년 개최한 오페트 축제와는 다르게 헤브-세드 축제는 아마 살면서 한번 볼까말까한 축제였다. 파라오에게는 제2의 즉위식이나 다름없는 행사였기에 정말 호화롭게 개최했다. 이 축제만을 위해서 '세드 제전'이라는 이름의 새 건축물을 지었을 정도. 세드 축제는 오페트 축제와 달리 아무나 참석할 수도 없었다. 선택받은 일부 귀족과 신관들만이 참석했다.[* 물론 세드 제전으로 향할 때 성대한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이 퍼레이드는 일반 평민도 직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드 제전 내부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핵심 코스는 일반 평민이 보는 게 불가능했다.] 왕이 여러 기물들을 들고 세드 제전 안을 행진하면 신관들이 왕을 축복했다. 이후 왕에게 새 관을 씌워준다음, 파라오가 사방으로 4개의 화살을 쏘았다. 이 화살은 이집트의 대적들을 몰아낸다는 의미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